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 독립운동 (문단 편집) === 1910년대 === 1910년대에는 일제의 [[무단 통치]] 때문에 국내에서는 주로 [[비밀 결사]] 형태의 독립운동이 전개됐다. [[대성학교]]는 자립단을, [[숭의여학교]]에서는 송죽회를 조직했다. 의병 활동은 크게 위축되어 서북 지방 일부에서 1915년까지 전개되다가 이후 [[만주]]로 이동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. 전라도에서는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 황제]]의 밀서를 받은 [[임병찬]]이 [[독립의군부]]를 조직하고 의병 전쟁을 준비하다 일제에 발각되어 지도부가 체포됐다. 대구에서는 [[박상진]]과 [[김좌진]] 등이 [[대한광복회]]를 조직하고 친일 부호 처단, 일제의 조세 탈취 등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가 조직망이 발각되어 해체됐다. 이들은 이후 [[간도]]로 넘어가서 무장투쟁을 지속했다. 그리고 [[법정사항일운동]]이 있었다. 1918년 10월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으로 3.1운동 5개월 전에 일어난 1910년대 종교계 최대 단일 항일 투쟁이자 국권회복운동이었다.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힘들어지자, 많은 [[독립운동가]]들이 [[만주]]와 [[연해주]] 일대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지속했다. 서간도에서는 경학사와 부민단이 조직되었고 [[신민회]]는 [[신흥무관학교]]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. 북간도 지역에서는 [[대종교]] 계열의 [[중광단]]과 대한국민회 등이 조직됐고, [[명동학교]]가 세워졌다. 또한 [[이상설]]은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세워 독립군 양성에 기여했다. 북간도 등지에서 조직된 [[북로군정서]]와 [[대한독립군]]은 이후 [[청산리 전투]]를 이끌게 됐다. [[연해주]]에서는 [[이상설]]이 권업회와 성명회를 결성했고, 일제의 간섭으로 이들 단체가 해체되자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를 설립했다. 1919년에는 [[손병희]]가 [[대한국민의회]]를 조직했다. 대한광복군정부와 대한국민의회는 [[3.1운동]] 이후 [[대한민국임시정부]]에 합류하게 됐다. [[상하이]]에선 [[신한청년당]]이 조직되어 [[김규식]]을 [[파리 강화 회의]]에 파견하기도 하였다. 1919년에는 한국 독립운동 역사 최대의 독립운동인 [[3.1 운동]]이 일어난다. 3.1 운동의 영향으로 임시정부 통합운동이 일어나 [[상하이]]에서 [[대한민국 임시정부]]가 탄생하게 됐다. 한편으로는, '복벽주의'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잔존한 마지막 시대가 1910년대다. 비록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 황제]]가 일선에서 물러나고, [[순종황제]]도 단순 이왕(李王)으로 전락했지만, 국권이 피탈된 지 채 몇 년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두 황제 역시 생존한 상태였으며, 아직 사회주의자나 계몽주의 계열로 돌아서지 않은 유자 세력이 건재했기 때문이다. 이들은 전제왕권, 혹은 입헌군주주의를 목표로 독립운동을 했으나 상기한 무장투쟁 계열 독립운동세력에 비해 그 한계점이 명확했고 또한 세력이 미비했다. [[1919년]] [[3.1 운동]] 직후 설립된 상하이임시정부가 [[대한제국]] 관료를 지낸 뒤 일제에게 남작 작위를 받은 [[김가진]]을 망명시켰고, 또한 부평군수를 지낸 바 있는 전협의 [[대동단]]을 통해 고종황제의 5남 [[의친왕]]을 망명시키려 한 대동단 사건이 그나마 유명하다.[* 1919년 11월 9~10일의 일. 기록에 따라 날짜, 체포된 위치(신의주역, 혹은 중국 안동역) 등이 조금 다르다. 자세한 내용은 [[의친왕]] 문서 참조.] 아주 넓은 범주에서는 [[13도 창의군]]도 복벽주의 계열로 볼 여지가 있다. 상기한 대동단 사건 이후 그나마 식민지 내 여론에 의식해 구 황족에 대해서는 유화 정책을 펴던 일제가 이왕가에 대해서도 강경하고 삼엄한 감시, 관리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복벽주의 계열은 소멸하게 됐다.[* 이후, 구라파([[유럽]])으로 신혼여행길에 오르던 [[영친왕]]&[[이방자]] 내외가 중국 항에 기항했을 때 임시정부에서 황태자 부부의 신변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사전 발각으로 무위에 그친 바 있으나, 이 사건을 복벽주의로까지 확대해석하기는 어렵다. 2010년대 현재 존재하는 우리황실사랑회 등 복벽주의 단체 역시 이 당시 복벽주의 세력의 오롯한 후신이라 보기 어렵다.][* 다만, 우리황실사랑회는 엄밀히 따져서 복벽주의 단체가 아니라 황실복원론 단체이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